일진 소녀와 포괄적 악플
가벼운 이야기/일상 | 2009/06/11 12:53
1. 전교생이 스무 명 쯤 되는 한 시골 분교에 강의를 나갔는데...... 가운데에 참 '멋들어진 포즈'로 앉은 여학생이 보였다. 아마 초등학교 6학년, 최고학년 일진 쯤 되는 모양. 20분짜리 짧은 강의 동안 그 꼬나보는 눈빛과 시의적절하게 터져주시는 조소 때문에 참으로...... 실소했다. 물론 겉으로 드러내보일 순 없었지만 말이다. 뭐 물을 것도 따질 것도 없이 어른이라면 무조건 적대하고 보는 태도는 역시나 '질풍노도의 시기'만의 특권이겠거니. 그리고 모든 어른들에 대한 그 적대감, 그 치기가 훗날 세상을 바꿀 만큼 거대한 벡터가 되겠거니......
2. ...... 라고 속 넓게 생각하면 좋겠지만 역시나 눈앞에서 피식피식대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xasfqwoghaosfoasf 나 ashfpashgnxv 같은 욕지거리를 내뱉지 못한 건, 또는 그 아이에게 "그런 태도로 강의를 들으면 안 된다"고 한 마디 하지 않은 건 - 어쨌거나 강사라는 지위 때문이기도 했지만, 상대가 초딩 꼬맹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초딩 꼬맹이랑 싸운다는 게, 들이는 공력에 비해 정말이지 의미없는 일이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3. 반면 악플에 대해 그렇게 속 넓게 대처할 수 없는 건 상대가 초딩 꼬맹이라는 걸 '모르기' 때문인 것 같다. 존댓말과 쿨게이스러움으로 치장된 고단수 악플을 보고 있다 보면, 이게 악플인지 아니면 정말로 내게 무언가 조언을 해 주고 싶은데 말주변이 없다 보니 사람 기분을 나쁘게 하는 건지 구분이 안 되는 경우가 있다. 모 병원에서 CVA 환자들과 씨름하고 계신 김 모 씨는 그 고단수 악플을 바라보며 내게 "그냥 xasfqwoghaosfoasf 진짜 질 떨어지는 악플이구만, 별 상상을 다 한다"며 내 걱정을 비웃었지만...... 아니, 유시민 같은 대단한 정치인도 말주변이 없어 옳은 소리를 하면서도 욕 먹고 다니는데, 진짜 혹시나...... 할 수는 있잖아.
4.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 시골 분교의 일진 소녀의 예의없는 태도를 '논리적으로' 꾸짖는다 한들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그건 정말이지 별 의미가 없는 일이다. 상대를 이성적인 대화의 파트너로 본다고 해서 모든 것이 이상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의외로 이런 경우에는 그냥 상대를 무시하는 것이 최선의 해결책이다. 질풍노도의 시기에는, 적어도 자신보다 나이가 열 살 이상 들어보이는 모든 사람의 말이 다 기성세대 국개들의 기득권 놀음으로 보이니까. 질풍노도의 일진 소녀와 "진실과 거짓이 광장에서 서로 맞붙게 하는" 대토론을 여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5. 신원 미상의, 모르는 사람의 댓글에 얼마나 성의있게 대응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도 정말이지 어려운 문제인 것 같다. 댓글이 설령 쿨게이스러움, 글쓴이를 얕잡아보는 태도 따위로 가득해 '포괄적 악플'(검찰도 쓰는 표현인데 하물며 일개 블로거야......)의 범주에 들어간다 해도, 그게 정말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의 댓글이라면 분명 그 안에 어떤 진정성 같은 것이 있을 터이다. 그러나 김 모 씨가 말했다. "별 상상을 다 한다"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인터넷의 익명성에 기대 그리 쉽게 남을 얕잡아 볼 리가 있나.
6. 일진 소녀는 술자리에서 알콜과 함께 이야기되는 가벼운 가십거리가 되었다. 오만한 얘기가 될 지도 모르지만, 그런 '포괄적 악플'에 대응하는 방법도 딱 그 정도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모든 댓글에 응답하고, 토론하거나 토의하고, 대화의 장을 여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그러기에는 일상이 너무 바쁘고, 하늘이 너무 높다. - 일진 소녀를 교화시키기 위해 강의 시간을 쪼갤 수 없었던 것처럼, 모든 날선 공격을 맞받아치기 위해 내 공부할 시간을 쪼개는 것도 실로 무의미하지 않은가. 설령 오만해보일지언정, 인터넷에 그렇게 긴 시간을 투자할 수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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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랑 선생님은 다른 건가요? 제가 존경하던 한 선생님은 그런 아이 하나하나 신경써주셨던 분이었는데... 효과는 있었을 지 없었을 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런 자그마한 노력조차 없다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겠다... 하는 생각이 이제서야 드네요.
아, 약간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저는 보건소에서 공중보건의사로 일하고 있고, 저 초등학교에는 성인병 관리라는 주제로 20분짜리 짧은 강의를 의뢰받아 잠깐 나갔었던 거에요. 그래서 '선생님'이 아니라 '강사'라고 표현한 거구요.
선생님이야 학생들을 가르치고 이끌어나가는 게 목적이지만, 제 목적은 지역 주민의 건강을 관리하는 거죠. 아무래도 학생 대상 강의는 후순위일 수밖에 없고...... 만일 제가 저 학생의 담당 교사였다면, 적어도 정열이 남아있는 한은, 저 아이의 치기를 좀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여러가지 노력을 해야 했겠죠. 그건 당연한 말씀입니다. ㅎㅎ
저는 그냥 살포시 IP 차단 버튼을 눌러줍니다. ^^
근데 사실 대놓고 악플이 아니고서는 그런 식으로 하기도 애매한 데가 많아서.....
근데 그냥 악플보다 저런 고단수 악플이 사람 심정을 긁어놓는 게 더 심하긴 해요. 마음같아선 당연히 삭제/차단크리 들어가고 싶죠. ㅎㅎ
그런 애들에게는 무시가 약이지 뭐 ㅎ
예의가 없는 사람들하고는 아무것도 못해.
물론 가끔 형식은 악플이지만 내용은 또 배울 부분이 있는 경우도 있으니
그런건 유심히 봐야겠지만 ...
그게 아니라면 깔끔히 무시해주는게 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