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라면 모르겠거니와, 책을 쓴다면 모름지기 누구나 그 활자 한 자 한 자에 자신의 모든 것을 불어넣기 마련이다. 단돈 이만 원에 자신의 지혜를 모두 가르쳐 줄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일부 내용을 빼놓고 책을 쓴다거나, 어리석은 대중이 자신의 뜻을 이해할 리 없다며 묵언(默言)을 하는 것 등은 사실 몹시도 양심에 거리끼는 일이다. 이것은 실제로 글을 써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감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고로 물리적 한계로 인해 모든 현인들과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이상,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물론 100% 무조건 통하는 얘기는 아니다. 자본주의의 위대한 힘에 의해 모든 것은 상품화된다. 현인이 힘을 다해 만든 책은 그리 많지 않고, 그저 하나의 상품일 뿐인 책이 참 많다. 하지만 이런 책을 구분해내는 것은 사실 어렵지 않다. 예를 들어 그 목록을 소개하면......

20대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는 책의 목록
30대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는 책의 목록
40대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는 책의 목록
억대 재산가가 되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 책의 목록
명상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 책의 목록

이런 식이다. 현인이 힘을 다해 만든 책이라면 사실 활자가 무겁고 읽기가 다소 버거울 수밖에 없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이런 어려운 내용에 부담감을 느끼고 쉬운 책들을 찾아가게 된다. 제목에서부터 진지함이 떨어지고, 마치 그 한 권의 책에 인생의 모든 것, 어떤 학문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책을 통해서나마 현인과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누고 싶다면, 독자 또한 현인과 대화하기에 걸맞은 진지함과 격을 갖출 필요가 있다. 이게 무슨 책을 각 잡고 읽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쉬운 길만 찾아가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특히 이런 '쉬운 길'을 함부로 택하게 되면 어설픈 지식으로 현인들의 지혜를 깎아내리게 되는 우를 범하게 되기도 한다.

의학을 예로 들어, 대한민국의 모든 의학도들, 의사들은 육 년 여에 걸쳐 기실 몇십 권은 될 법한 기초의학서를 모두 통독한 사람들이다. 그러고 나서야 그들은 의사로서의 진지한 의식을 갖추게 된다. 그런데 누군가가 어디에서 동종요법 블라블라, 자연으로 돌아가라 블라블라, 현대의학의 한계 블라블라 하는 가십성 책을 찾아서 읽은 뒤 현대의학의 한계와 의사의 비윤리성에 대해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행동한다면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의사들이 현인들이 쓴 몇십 권의 책을 읽음으로써 수십 명의 현인들과 대화를 나누었다면, 이 사람은 포장마차 구석에서 들려온 음모론을 어깨너머로 들었을 뿐이다. 사실 이 사람이 진정으로 현대의학의 한계와 그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공부를 하고 싶었다면, 가장 먼저 읽었어야 할 책은 이런 책이 아니라 당연히 이런 책이었어야 했다.

또 정치나 경제학 분야에서..... 많은 사람들이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고 싶어하지만, 그 신자유주의 비판자중에 경제학 교과서를 읽어본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렉서스와 올리브나무>나 <세계는 평평하다>처럼 신자유주의를 옹호하는 책 또한 읽어보는 사람들이 아주 드물다. 이 상태로 <사다리 걷어차기>나 <쾌도난마 한국경제>를 읽었다고 해서 장하준 교수와 같은 현인과 대화를 나누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이것은 대화라기보다 사사(師事)에 가깝고, 그 중에서도 가장 질이 안 좋은 사사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스승의 제자라고 해서 그 스승의 뜻 외에 다른 모든 뜻을 아예 접해보지조차 않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그러한 고로......

고전적인 정의 그대로, 독서란 독자와 저자의 대화이다. 현인은 책을 쓸 때 자신의 모든 것을 불어넣는다. 그러나 상인들은 책을 쓸 때 잘 팔릴 만한 상품을 창조해낸다. 그리고 서점에는 상품이 가득하고, 상품은 현인들의 책에 비해 훨씬 쉽고 자극적인 제목으로 독자를 유혹한다. 그리고 독자에게 현인의 지혜에 도전할 수 있는 만용(蠻勇)을 선사한다. 고로, 그 대우가 중요하다. 현인과 대화할 수 없다면, 그건 독서가 아니다. 서점에 가득 쌓인 상품들 사이에서 현인들의 숨결을 골라내지 못한다면, 나는 독서할 수 없다.

*** 이 글은 추유호 님이 넘겨주신 '독서 릴레이'의 일부입니다. 독서에 대해 진지한 생각을 해 보게 도와주신 추유호 님, 릴레이를 시작하신 Inuit 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 마는, 릴레이 기간이 이미 끝난 고로 다른 사람에게 바통을 넘기지는 않습니다. 사실 애당초 바통 넘길 데가 마땅찮아서 고민이 많았다능.


2009/06/23 17:04 2009/06/23 17:04

http://yeinz.kr/blog/trackback/501 (주소를 클릭하면 클립보드로 복사됩니다.)

  1. [릴레이] 나의 독서론 추유호's encyclopedia 에서 트랙백 | 2009/06/24 19:39 | 지우기 |

    아침에 블로그를 봤더니만 깜짝 놀랐다. Inuit님의 '독서란...' 릴레이가 무려 나에게까지 넘어온 것이 아닌가! 릴레이 앞쪽의 명단을 보니 메이저 블로거들이 수두룩하다. 독서 릴레이를 하는 것은 알았어도 인터넷의 변방인 이곳까지 넘어올 줄은 몰랐다. ㅎㅎ 나 자신으로 말하자면 겨우 책장 몇 개 정도의 책밖에 소유하고 있지 않고, 거기에 그중 실제로 읽은 책은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으므로 장서가의 조건에서 따지는 보관공간의 걱정까지는 한...

  1. 로이  2009/06/24 10:19 | PERMALINK | 고치기 | 답하기 |

    아이 무거워 ㅋㅋㅋ
    양판소 한자한자에 너의 지혜가 담겨있구나.
    그만한 격식을 가지고 읽어주마.

  2. 추유호 2009/06/24 21:49 | PERMALINK | 고치기 | 답하기 |

    독자와 저자와의 대화라 표현하니까 독서가 또 새로운 느낌으로 와 닿네요. ㅎㅎ
    포스트에 응해주신 것에 대해 정말 감사드립니다. :)

[로그인][오픈아이디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