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란 역시 겪어보기 전에는 모르는 것일까. 좌파 진영에서는 싫어하겠지만 정운찬이란 사람이 나름 학자이자 정책가로서 소신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까도 까도 깔 게 남아있는 '양파운찬'이었을 줄이야. 노무현 전 대통령 행정부에서 정운찬을 여권 주요 인물로 몇 차례나 거론했던 것으로 아는데 끝까지 한 자리도 못 차지하는 것이 이상했었는데, '양파운찬'의 진면목을 행정부에서 이미 파악했었던 것일런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재미있었던 장면 하나. 감세정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한나라당 의원의 질문에 정운찬 후보자는 "경제학자로서 효과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돈이 많은 사람이 혜택을 더 많이 볼 수밖에 없다"는 대답을 했다. 이명박 행정부의 감세 정책을 대놓고 까는 답변이었다. 물론 경제학자라면 당연히 해야 할 대답이긴 했지만 한나라당 의원으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결국 의원은 "후보자의 전문 분야가 아니라서 잘 모르시는 것 같다"는 식으로 얼버무리고 넘어갔는데, '감세 정책이 거시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거시경제학자의 전문 분야가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의 전문 분야라는 말인가?

위의 장면에서 느꼈던 또 한 가지 감상은 역시 정운찬이 아무리 '양파운찬'이라지만 기성 정치인들만큼 거짓된 인간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가 기성 정치인이었다면 "이론상으로는 이러저러하지만 실제로 이명박 행정부의 감세정책은 이러저러하기 때문에 이러저러하게 블라블라하다"는 식으로 요점은 전혀 없는 빈껍데기같은 발언으로 잘 넘어갔을 것을 말이다. 감세 정책에 힘을 실어주려는 여당 의원의 질문같지도 않은 질문을 정공법으로 비판해버리는 총리 후보자라니, 흥미로운 풍경이긴 했다.

어쨌든 그 재미있는 장면에도 불구하고 정운찬 후보자는 여러모로 흠결이 많았다. 이건 정운찬 후보자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8명의 후보자 중 4명의 후보자는 위장 전입 문제가 있다고 하고, 여성부 장관은 여성 정책에 대해 문외한인데다 법무부 장관과 대법관은 법을 '고의로' 어긴 정황이 포착되었다. 땅을 가지고 장난질을 친 '복부인'들이 이번에도 후보자의 대다수를 차지했다. 그동안 이명박 행정부의 인사가 늘상 그랬듯이 이번 인사도 엉망이었다. 물론 우리가 보고 있는 건 정치꾼들의 협잡이다. 적당히들 넘어갈 것이다. 하지만 그 지독히 비관적인 현실과 별개로 상식에 의거한 단 한 가지 질문만은 가슴 속에 새겨두지 않을 수 없다.

큰 흠결이 있는 후보자가 절반 쯤 된다고 치자. 수가 너무 많으니 적당히 한 두 명만 자르고 나머지는 장관으로 임명해야 할까. 국정의 안정을 위해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절반이 아니라 전부라 한들 뭐가 달라질까. 백 명이라 한들 달라질까. 백 명이 아니라 299명이라 한들 무엇이 달라질까. 나라의 법을 만들고 행정을 한다는 것이, 수천만의 국민 앞에서 일한다는 것이 언제부터 그렇게 적당적당히 넘어가는 것이 되었을까. 누군가는 너무 급진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큰 흠결이 있는 사람이 정부(입법, 행정, 사법 어느 분야에서든)에서 일해선 안 된다"는 것이 정말 그리도 급진적인 생각일까.

1줄 요약
이런 글을 보고 디시인사이드에서는 일컫기를 '아X발꿈'이라고 한다.


2009/09/24 18:04 2009/09/24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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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엽우의 생각 leafriend's me2DAY 에서 트랙백 | 2009/09/25 12:24 | 지우기 |

    ″큰 흠결이 있는 사람이 정부(입법, 행정, 사법 어느 분야에서든)에서 일해선 안 된다″는 것이 정말 그리도 급진적인 생각일까.

  1. 허니몬 2009/09/25 17:42 | PERMALINK | 고치기 | 답하기 |

    우리나라에서 청렴결백하고 모범적인 정치인은 나오기 힘든 것일까요?

    정치인이 되려고 하면, 거기에 이미 많은 돈이 드니까, 본전을 뽑으려고 하다보니 그런걸까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부족한 정치인들을 보자니 참 슬프네요.

  2. 예인 2009/09/28 15:18 | PERMALINK | 고치기 | 답하기 |

    언제나 결론은 현시창 아니겠습니까.

    저런 문제를 실질적으로 어떻게 혁파할 것인가는 지식인들의 몫으로 남겨놓더라도......
    "큰 흠결이 있는 사람이 정부(입법, 행정, 사법 어느 분야에서든)에서 일해선 안 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생각을 '현실이 시궁창'이라는 이유로 버려서는 안 되겠지요. 저 상식적인 생각을 저버린 바보들이 계속 한나라당을 뽑는 거 아니겠습니까.

  3. Hwan 2009/10/15 02:28 | PERMALINK | 고치기 | 답하기 |

    요즘 정운찬 총리의 아호각 '이사'라는 이야기가 있죠. 하도 여기 저기 이사직을 많이 맡아 놔서...

    학자로서는 문제가 안되도 공직자로서는 문제가 될 것이 많다는 것을 좀 알아야 할텐데...

  4. 예인 2009/10/20 22:40 | PERMALINK | 고치기 | 답하기 |

    사실 학자로서도 문제는 문제 아닐까요? :)
    그런데 사실 이런 문제가 이번에 처음 나온 것도 아니고, 아주 작은 조직에서조차 고위직에 오른 사람들이라면 그 정도 비리는 비리로도 쳐주지 않는 것이 현실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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