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병신론 해제(解題)
무거운 이야기/정치 | 2009/09/29 21:44
<20대 병신론>은 임맑쓰의 저작이다. 그 제목과 달리 그 저작의 방향성은 '20대가 정치에 무관심하며 결국 그로 인해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라는 구세대들의 인식을 공격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즉 이 저작의 제목은 '20대 병신론'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20대 병신론'에 대해 적극적으로 저항하기 위해 붙여진 것이다.
역사적으로 386들은 매우 혁명적인 역할을 담당해 왔다. 386은 자신이 지배를 확립한 곳에서는 어디서나 봉건과 독재, 산업화의
앙시앙 레짐(구체제)을 종식시켜 왔다. 386은 인간을 '자본에 의한 상하관계'에 묶어 놓는 잡다한 세속적 자본주의의 끈을
가차없이 끊어버렸으며, 그 외의 모든 경제학적 논의를 미국 제국의 악의,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투쟁'을 촉발시킬 유인으로
만들어 놓았다. 또한, 가장 신성한 개인주의의 환희, 자본주의의 환희, 민주주의의 환희를 부르주아지의 타도라는 얼음같이 차디찬
물 속에 빠뜨려버렸다. 또 개인의 존엄성을 구체제 타도의 미명 하에 용해시켜버렸으며, 결코 무효화될 수 없이 공인된 무수한 자유
대신 최후의 궁극적 자유를 위한 통제와 선동이라는 단 하나의 파렴치한 부자유를 세워 놓았다. 한 마디로, 386은 앙시앙 레짐에
의한 착취를 타도하고자 개인의 모든 사상과 자유로운 의견을 착취한 것이다. 386은 지금까지 존경과 경건한 경외심으로 받들어졌던
모든 직업으로부터 그 후광을 걷어냈다. 의사, 법률가, 성직자, 시인, 과학자를 쁘띠부르주아 또는 앙시앙 레짐의 일부로
전환시켜버린 것이다. 386은 가족으로부터 그 감정의 장막을 찢어내고 가족관계마저 계급 투쟁과 세대 갈등의 본산으로 만들었다.
첫 문단은 386에 의한 과거의 혁명에 대한 서술이다. 주의할 점은 여기에서 386이 정확히 386 세대를 지칭한다기보다 구(舊) 운동권 세대, 즉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시대의 대학생 지식인 계층을 상징하는 하나의 함축적 단어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이들 구(舊) 지식인 계층은 앙시앙 레짐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에 대적하였다. 일련의 경제학적 논의, 통화주의를 비롯한 주류경제학을 후진국의 경제 성장을 막고 초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미국의 음모로 보았으며 이러한 경제학적 논의를 프롤레타리아트를 억압하기 위한 부르주아지의 선전전으로 이해했다.
이러한 미국 제국과 부르주아지의 음모와 선전을 타도하기 위해서 구(舊) 지식인 계층은 단결과 투쟁을 필요로 했으며, '단결하여 투쟁하는' 그들은 늘 어디에서나 민주주의의 복권을 부르짖었다. 그러나 정작 그 집단 내부에선 개인주의가 찢겨져나갔고 다수결의 원칙이 남용되었으며 다수의 폭력이 상당부분 용인되었다. 내부에서는 성(性) 문제가 심심찮게 불거졌으나 금새 진화되었고, PD와 NL의 논쟁은 역설적으로 PD와 NL이 아닌 것에 대한 철저한 배타의 형태로 나타났다. 즉 그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집단을 매우 비민주적인 방법으로 운용했는데, 아마도 앙시앙 레짐의 타도라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다른 가치를 무시할 수 있다고 여겼던 것 같다. 즉 '신성한...... 환희를 부르주아지의 타도라는 얼음같이 차디찬 물 속에 빠뜨려버리고' '개인의 존엄성을 구체제 타도의 미명 하에 용해시켜버리고' '무수한 자유(집단 내의 자유, 개개인의 자유)'를 '최후의 궁극적 자유(정권 타도와 민주정 수립)'를 위해 통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20대는 아직 전국에 흩어져 있고 자기들 간의 상호경쟁으로 분열되어 있는 지리멸렬한 대중에 머물러 있다. 설사
그들이 모여 보다 긴밀한 결합체를 이룬다 해도 그것은 아직 그들 자신이 연합한 결과가 아니라 386이 연합한 결과이다.
386들은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모든 20대를 동원하고 싶어하며, 게다가 당분간은 동원되지 않는 20대를 병신으로
몰아세울 수 있는 힘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서 20대는 자신의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적의 적, 즉 앙시앙 레짐의
잔재인 이명박과 싸우는 것이다. 이리하여 전체 역사적 운동은 386의 수중에 집중된다. 그렇게 얻어진 승리는 모두 386을 위한
승리인 것이다. 그러나 대학 교육이 발전하면서 20대는 숫자가 증가할 뿐 아니라 보다 큰 무리로 집중되어 힘이 더욱 성장하며,
그 힘을 더욱 자각하게 된다. 기계가 노동의 모든 차이들을 소멸시키고 거의 모든 곳에서 임금을 동일하게 낮은 수준으로 감축시키는
것과 비례하여 20대 신규 노동자의 다양한 이해관계와 생활조건은 더욱 더 평준화된다. 386 간의 경쟁이 격화되고 그 결과
민주당이니 민주노동당이니 진보신당이니 하는 것들이 갈라지면서 20대의 처우는 갈수록 얄팍해지게 된다. 앙시앙 레짐과 386
정규직들의 싸움이 치열해지면서 그 싸움에 참여하지 못한 20대의 생활은 갈수록 불안정해진다. 따라서 개별 386과 개별 20대
간의 충돌은 갈수록 두 계급간의 충돌이라는 성격을 띠게 된다. 그 결과 20대들은 386에 남근의 껍데기나 벗기라는 욕설을
퍼붓고, 이명박이나 386이나 자기 이익 앞에서는 그 놈이 그 놈이라는 깨달음을 얻으며, 386이 그동안 만든 모든 단체에 대한
회의를 가지게 된다. 싸움이 일어나 손해를 보더라도 그 구악을 답습하지는 않는다. 때때로 20대는 승리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이다. 싸움의 실제적 결실은 직접적인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느끼는 구체제와 386 전부에 대한 회의에 있다.
두 번째 문단은 20대가 본격적으로 '동원'되기 시작하는 시점에 대해 다룬다. 구(舊) 지식인 계층은 앙시앙 레짐의 잔재인 이명박 행정부의 등장에 따라 다시금 그 잔재를 몰아내기 위해 투쟁을 시작하지만, 이 투쟁의 양상은 과거와는 다소 다른 양태로 전개된다. 구(舊) 지식인 계층의 상당수가 새로운 기득권 - 물론 앙시앙 레짐보다는 확연히 작은 - 을 형성함에 따라 이 투쟁은 단순히 앙시앙 레짐을 무너뜨리는 것에 덧붙여 앙시앙 레짐의 절대적 권력을 구(舊) 지식인 계층의 몫으로 일부 이양시키는 형태로 바뀌었다. 예를 들어, 구(舊) 지식인 계층이 이를 의도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노동운동은 부르주아지의 몫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양도하는 형태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를 다시 이분하여 '못 사는 이들'의 몫을 '잘 사는 이들'의 몫으로 이양하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았다.
따라서 아무런 기득권을 갖지 못한 20대는 앙시앙 레짐과 구(舊) 지식인 계층의 투쟁이 반복될수록 오히려 파이가 작아지는 역설적 결과를 목도한다. 이는 20대가 특별히 깨어 있다거나 무지몽매하다거나 하여 이런 결과를 읽어내는 것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실감'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투쟁에 동참함으로써 얻는 이득은 대부분 구(舊) 지식인 계층으로 이양되므로 20대가 그 몫을 받기는 기대하기 어렵다. 투쟁의 결과 얻을 수 있는 새로운 파이는 투쟁에 동참한 여러 계층의 정치적 입지에 따라 분배되는데, 그 정치적 입지란 다른 말로 '기득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20대는 기존에 존재하는 모든 투쟁의 진정성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되며 구(舊) 지식인 계층에 저항한다. 이 저항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명박 행정부를 비롯한 앙시앙 레짐의 잔재에 대한 지지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정치세력, 그것이 앙시앙 레짐의 잔재이든 그에 저항하는 세력이든간에 관계없이, 그 자체에 대한 혐오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요컨대 20대는 모든 곳에 존재하는 기존의 사회, 정치적 질서를 반대한다. 20대는 현존하는 그 모든 질서 속에서는 386의
비중에 관계없이 20대가 설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마지막으로 20대는 어디서나 이기주의를 넘어선 온전한 개인주의의
창달에 노력한다. 20대는 386과는 달리 자신의 견해와 목적, 곧 '나 자신을 위한 이익 창출'을 감추는 것을 경멸한다.
20대는 자신의 목적이 이명박은 물론 감언이설로 20대를 꼬드기는 386과도 아무 관계없다는 것을 공공연히 선포한다. 모든
386은 엿이나 먹어라. 20대가 386에게 동원당함으로써 얻을 것은 쇠사슬밖에 없으며 잃을 것은 온 세상이다.
마지막 문단에서 임맑쓰는 20대가 가져야 할 덕목에 대해 논한다. 첫 번째 덕목은 '개인주의'이며, 두 번째 덕목은 '위선에 대한 저항'이다. 전자가 구(舊) 지식인 계층 최대의 악덕인 '통제'를 타파하기 위한 핵심적 구호라면, 후자는 구(舊) 지식인 계층의 차악인 '위선'에 대한 노골적인 저항이다. 구(舊) 지식인 계층은 '투쟁하지 않는 자는 얻을 수 있는 것도 없다'며 20대를 선동하지만 이는 20대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앙시앙 레짐의 그것에 비해 초라할지언정 구(舊) 지식인 계층은 이미 안락히 살아가는데 무리가 없는 충분한 파이를 확보하고 있으며, 따라서 투쟁을 통해 그 파이를 늘려나갈 수 있다. 그러나 20대는 가진 기득권이 없으며, 따라서 투쟁을 통해 이양받을 권리 또한 극히 적다. 20대로 하여금 집단적 투쟁을 강요하던 구(舊) 지식인 계층은 토익 점수와 어학연수에 게을렀던 20대를 언제든지 '무능한 개인'으로 낙인찍을 준비가 되어 있다. 따라서 그 선동에 이끌려 구(舊) 지식인 계층의 투쟁에 머릿수만 얹게 된다면 결국 20대는 구(舊) 지식인 계층에 의해 통제당하고 그들의 뜻을 주입당할 뿐(얻을 것은 쇠사슬밖에 없으며) 어떤 권리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잃을 것은 온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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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잘 읽고 갑니다. 의학이 아니라 사회학이나 철학을 전공했다고 해도 손색이 없는 글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