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한방해부학에 대한 한의계의 연구는 구조(structure) 위주의 관점과 기능(function) 위주의 관점이 공존하고 있다. 16세기 이전 서양 철학에서 줄곧 '영혼'이란 개념이 육체와 나누어진 하나의 실체라고 주장했던 반면 17세기 이후 영혼의 개념이 의식(concsiousness, mind)의 뜻으로 변모하게 된다. 의식(mind)은 하나의 실체라기보다 사람이 가진 기능에 초점을 맞춘 단어이다. 한의학의 해부학, 특히 뇌-심장 논쟁이라든지 경락의 실존을 둘러싼 논쟁은 이와 유사한 성격을 가진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볼 때, 최신 해부학의 성취와 비교해볼 때 한의학의 해부학은 매우 조악한 수준인 것이 사실이다. 또한 정신작용을 뇌가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심이 주관한다고 생각하는 경우 등, 어떤 기능을 A라는 장기가 수행한다는 것이 증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의학은 B라는 장부가 수행한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의학계에서는 여러 가지 근거를 들어 내경 시대 해부학이 옳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 논문에서는 콜레스테롤의 심맥 관계에 대한 위해가 알츠하이머병과 같은 정신질환의 형성에도 똑같이 기여한다는 한 관점을 한방해부학의 논리적 근거로 들고 있다.1 그러나 이러한 대응 논리는 다소 무리한 것인데, 심주신(心主神)이란 말이 몹시 광범위한 정신 활동을 지칭하는 것에 비해 이러한 설명으로는 알츠하이머병과 같은 극히 일부의 정신 질환만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을 채택한다면 우리는 심주신(心主神)은 물론 간주신, 비주신, 폐주신, 신주신까지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어떤 사람들은 ‘최신 해부학이 말하는 심장과 한의학적인 심(心)은 서로 다르다’고 주장하나, 내경이나 동의보감의 해부학적 서술을 보면 틀림없이 심(心)에 대해 얘기하며 최신 해부학의 심장을 묘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내경(內經)의 우수성을 주장하기 위해 내경이 해부학적 장기의 모습을 비교적 충실히 묘사하고 있음을 주장하다가 이 논쟁에서는 장기와 장부가 서로 다른 개념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를 설득력 있는 주장으로 받아들이기는 아무래도 어려워진다.

또 어떤 사람들은 과학자들이 한방해부학이 결국 옳다는 증거를 속속들이 내놓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명확한 근거자료 없는 주장은 오히려 비판론을 강화시킬 뿐이므로 역시 지양해야 한다. 또 위의 심혈관계와 알츠하이머의 관계처럼, 극히 일부의 사례를 마치 전체의 사례인 것처럼 오도하는 것도 논리를 오히려 취약하게 만들기 때문에 지양해야 할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한의학의 비(脾)에 대해 말하면서 ‘기능은 췌장의 그것을 취하고 형태는 비장의 그것을 취했다’는 설명을 채택한다. 이는 한의학에서 말하는 비(脾)가 그 해부학적 위치나 모양은 비장(Spleen)과 비슷한 반면, 수행하는 기능은 췌장(이자, Pancreas)과 유사한 면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14세기 논리학자 오컴은 자신의 저서에서 “보다 적은 수의 논리로 설명이 가능할 경우 많은 수의 논리를 내세우지 말라”는 경제성의 원리를 주장2한 바 있다. 흔히 오컴의 면도날이라 불리는 이 원리가 이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다.

실재적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 이상, 불필요한 가정을 내세우게 되면 논리의 치밀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비의 기능은 췌장의 그것을 취하였고 형태는 비장의 그것을 취했다’는 설명보다는 ‘과거에는 비의 기능을 잘못 알고 있었다’는 설명이 훨씬 간결하고 타당하다. 한의학계의 이런 주장은 마치 새까맣게 탄 나무를 보고 ‘벼락을 맞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타당함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어떤 장치를 이용해서 나무가 완전히 잿더미로 변하지 않도록 적절히 그을린 다음 자신이 그을렸다는 흔적을 완전히 없앤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 것2과 비슷하다.
 
이런 무리한 주장이 나오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는 내경(內經, 한의학의 오래된 책 중 하나) 시대의 고대 한의학에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고, 현대 한의학과 고대 한의학을 '같은 수준의 것'이라 생각하는 한의학계 일부의 오류 때문으로 생각된다. 내경과 고대 한의학에 쓸데없는 권위를 부여하지만 않는다면, 오히려 이처럼 틀린 전제가 내경 시대에 존재했다고 해서 현대 한의학의 장상학 자체가 폐기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또한 고래로부터 한의학의 이론이 발전해온 과정을 살펴보면, 내경 시대의 해부학적 지식이 비록 폐기되지는 않았으나 실제 침구나 방제를 운용하는 데는 사실상 개입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장상학의 가치는 내경 시대의 조악한 해부학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인체에 대한 인식 수준이 현재에 비해 치밀하지 못했던 과거의 오류를 가지고 현재의 한의학을 매도하는 것은 부당하다.

다만 한의학계가 계속해서 내경 시대의 해부학적 지식이 옳다고 주장하며, ‘비의 기능은 체장의 그것을 취하였고 형태는 비장의 그것을 취했다’는 식의 설명을 계속할 경우 현대 한의학에 대한 신뢰 전체가 붕괴할 위험성이 있다. 결국 궁극적인 문제는, 한의학이 시대적 요구와 조류에 따라 끊임없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현재의 형태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내경이라는 한 권의 오래된 책과 고대 한의학에 무리한 권위를 부여했던 한의계 일부의 신비주의에 있는 것일런지도 모르겠다.

연재 : 새로운 한의학상의 정립이 필요하다
(5) 한의학의 장기 개념,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하나

  1. 정신기능소재로서의 뇌에 대한 한의학적 해석근거 연구. 김용훈, 김인락, 지규용. 동의생리병리학회지 제 16권 5호. 881-887. [Back]
  2. Wikipedia, 오컴의 면도날 [Back]
  3. Wikipedia, 오컴의 면도날 [Back]

2009/10/01 14:18 2009/10/01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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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엽우의 생각 leafriend's me2DAY 에서 트랙백 | 2009/10/05 03:40 | 지우기 |

    예인의 새벽 내리는 길 :: 한의학의 장기 개념,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하나 - 자신의 근원, 혹은 과거에 대해 부정을 못하면 잘못된 길로 빠지기 십상이다. 쉽게 말해서 잘못한 건 잘못했다고 하자.

  1. 김기왕 2009/11/25 08:50 | PERMALINK | 고치기 | 답하기 |

    현대 한의학에서 장상학(臟象學)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흔히 "한의학에 무슨 생리, 병리가 있나" 하는 이야기로 표출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한의학을 학문 없는 기술의 체계로 전락시킬 수 있는 주장입니다. 예인님 말씀 대로 장기 개념의 오류에 대해서는 그냥 "고인들이 몰랐을 뿐이다"라고 인정하는 것이 바른 답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인정하고 나면 현대의 장상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아직도 우리의 한방생리학 교과서는 고인들의 오류를 합리화하기 위한 갖가지 설명들로 가득하니까요. 관찰 가능한 현상 사이의 관계를 설명할 새로운 장상학이 필요합니다. 이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고... 흥미진진한 과제가 될 것입니다.

  2. 예인 2009/11/28 16:36 | PERMALINK | 고치기 | 답하기 |

    앗 선생님!!!!!!!!!!!!!!!!!!
    '관찰 가능한 현상 사이의 관계를 설명할 새로운 장상학'이라는 말씀이 무척 마음에 남습니다. 무척 좋은 말씀이시고, 결국 제가 찾지 못한 어떤 - 궁극적인 대안을 깔끔하게 드러내는 표현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뒤이어 말씀하신 '이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말씀이 아예 가슴에 박힙니다. 저도 그 일이 어려운 일이라기보다 흥미진진한 일로 느껴질 만큼 열심히 공부해야겠습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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