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유령이 구세대 사이를 배회하고 있다. 20대 병신론, 20대 X새끼론 따위로 불리는 이 유령은 "20대는 정치적 이슈에 무관심하며, 자기 자신의 '스펙'을 높이는데 정신이 팔려 결국 정치적으로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라며 20대를 매도한다. 20대 사이에서 높은 한나라당의 지지율이나 낮은 투표율, 집회에 대학생들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등이 그 근거로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20대 병신론은 역설적으로 "왜 구세대 개혁세력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가"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20대는 정치적 이슈에 무관심하며, 또한 구세대와 달리 개인주의를 악덕으로 여기지 않는다. 자, 여기에 이런 '현상'이 있다. 그렇다면 그 '현상'이 일어난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세대 개혁세력은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는가, 이 현상의 기저에 무엇이 있는지를 진지하게 분석하지 않는다. 대신 이 현상이 단순히 20대의 미성숙, 시쳇말로 '찌질함' 때문에 일어났다고 편의적인 결론을 지어버리고는 20대를 매도하는 실로 무의미한 활자 낭비를 계속한다.

특히 한양대의 김용민 겸임교수가 20대를 비판한 글까지 가면 이건 비판이란 말이 사치로 느껴질 지경이다. 근거는 박약하고 논리는 비약적이다. 이런 수준의 글이 정말 20대 비판론의 본체라면 뒤집어 386 병신론을 주창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등록금 반값 공약을 부도낸 까닭은 20대에 대한 정치적 부채의식이 없어서라고 한다. 대운하를 부도낸 까닭은 대운하 지지세력에 대한 정치적 부채의식이 없기 때문일 것이고 재래시장에게 립서비스만 계속하는 까닭은 자영업자들에 대한 정치적 부채의식이 없기 때문일 것이겠거니. 촛불집회에 동감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동원'하고서는 그들이 여전히 집회에 부정적이라고 투정을 부린다. 이 바보같은 글은 그냥 왜 20대가 자기 뜻과 다르게 움직이고 있느냐, 왜 20대가 내 뜻대로 '동원되지' 않느냐고 뿌잉뿌잉대는 투정에 불과하다.

단순하게 생각해보자. 20대는 한 열 명 쯤 모여서 서로 쑥덕거리기를 좋아하는 '또래 집단'에 불과한가? 그렇지 않다. 20대라는 집단은 엄청나게 방대하다. 어떤 정치적 경향을 갖고 모인 집단도 아니며 구세대와 비교해 유전자가 갑자기 달라지거나 한 것도 아니다. 20대란 건 그저 편의상의 구분일 뿐이고 숫자일 뿐이다. 그렇다면 20대는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졌기 때문에 기존 세대와 전혀 커뮤니케이션할 수 없었는가? 그럴 리도 없다. 20대는 20년이 넘는 긴 시간동안 앞선 세대와 끊임없이 커뮤니케이션하고 자랐다. 그들은 앞선 세대가 만들어놓은 사회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익혔으며 또한 사유하였다. 바로 그 토양 위에서 그들만의 가치관을 쌓아나갔다. 따라서 흔한 시쳇말로 '20대는 병신같다'면, 결국 앞선 세대가 20대와 나눈 커뮤니케이션이 그만큼 병신같았다는 의미다.

지금이 이명박 정권의 우둔함이 한국의 모든 악덕을 가릴 정도로 압도적인 시대라면, 지난 10년간 돋보이게 드러난 것은 구(舊) 운동권의 모순이었다. 왜 하필 지난 10년 간이었는가? 아무래도 이들 자신이 여권으로 편입됨으로써 야권에 있었을 때에 비해 아무래도 자잘한 실수도 쉽게 주목받게 되었다는 점을 첫 번째 이유로 들 수 있을 것 같다. 게다가 이 시기, 그들의 핵심적인 적은 대부분 그 존재감이 흐려졌다.독재정권은 와해되었고, 미국은 '미제' 대신 복합적인 전략적 동반자로서 인식되기 시작했으며, 민자당 계열은 정권을 잃고 야권으로 떨어졌다. 즉 그 압도적인 적(敵)의 존재감이 흐려짐으로써, 그 존재감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내부의 모순이 비로소 드러났다는 점을 두 번째 이유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실로 여길 막으면 저기가 터지는 지경이었다. NL 계열 내부의 주사파의 존재가 진보세력의 내부고발로 인해 만천하에 공개되었고 그 종국에 민주노동당은 공약이랍시고 '코리아 연방 공화국'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노동운동은 "우리 모두는 노동자"라는 모토를 내걸었으나 그 긴 시간동안 '오직 정규직들만의 노동운동'을 결국 벗어나지 못했다. 노동운동의 혜택은 정규직에게 집중되었고, 아이러니하게도 비정규직 노동자나 하청업체의 파이는 노동운동이 거듭되면 거듭될수록 오히려 급속히 작아지기만 했다. 그 결과, 끝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들의 노동운동을 비난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분열'이 일어나고 만다.1 학생운동가들은 상당한 수준의 민주화가 진척된 시대에도 여전히 투쟁 일변도의 노선을 고집하는 등 일반 학우들의 생각과 완전히 괴리된 길을 걸었다. 앙시앙 레짐에 대한 투쟁이라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투쟁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위협하기까지 했고, 다수결의 원칙을 적용해선 안 될 곳에 남용했으며, 후계자를 키운다는 미명 하에 세뇌에 가까운 교육을 강요하는 등 그 내부의 비민주성을 끝내 버리지 못했다.

이것이 구세대 개혁세력이 20대에게 보낸 커뮤니케이션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20대가 이명박이나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것이 필연적 선택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앙시앙 레짐의 잔재가 20대에게 보낸 커뮤니케이션은 더욱 노골적으로 불편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무전유죄는 더럽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 되었으며, 복부인들은 투자나 재테크 따위의 멋들어진 단어를 자신들의 추악한 투기행위 위에 에르메스, 루이비통 따위의 명품을 걸치듯 장식해놓았다. "부자 되세요" 따위의 속물스런 인사가 횡행했다. 국회의원들은 상종 못할 X새끼들이었고 사법부의 권위마저 땅에 떨어졌으며 시장의 질서는 진흙탕에서 나뒹굴었다. 그러나 이런 지저분한 현실이 구세대 개혁세력에게 어떤 명분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유시민 씨가 그렇게 말했던가. 우리 모두는 앙시앙 레짐의 자식이라고. 내부의 비민주성을 끝내 극복하지 못한 구세대 개혁세력은 그것이 앙시앙 레짐의 잔재라는 것조차 깨닫지 못한 채 그에 먹혀들어갔다. '부동산 재테크'는 더이상 보수세력만의 몫이 아니었다. 인권에 대한 몰이해는 앙시앙 레짐의 적을 자처하는 그들 또한 피해갈 수 없는 함정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그들 자신의 폭력에 관대했고 신세대의 일탈에 대해서는 쓸데없이 엄격했다.

결국 그들은 앙시앙 레짐과 공생하였으며, 앙시앙 레짐의 방식을 스스로 체화하였다. 그들은 20대, 소위 IMF 세대라 불리는 이들의 대안이 될 수 없었다.

이상의 내용이 '그러니까 20대의 잘못이 없다'는 결론을 내놓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동안 20대와 커뮤니케이션해 온 그 구세대 개혁세력은, 앙시앙 레짐을 혐오하면서도 결국 앙시앙 레짐의 잔재를 체화하고 그와 공생하고 있는 구세대 개혁세력에게는 20대를 비판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그 비판은 현실 속 그들의 모습과 동떨어진 공허한 빈껍데기일 뿐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감동시키려면 선악을 막론하고 자신의 뇌와 심장을 모두 꺼내보여야 한다. "우리 모두가 앙시앙 레짐의 자식"이라 고백했던 유시민 씨처럼. 그러나 정말 구세대는 20대를 비판하기에 앞서 그 스스로를 비판하고 있을까? 그들은 20대로 하여금 '앙시앙 레짐과 투쟁할 것'을 요구하기에 앞서, 스스로 앙시앙 레짐과의 공생을 끊어낼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도 아니라면, 20대가 끝내 자각하여 앙시앙 레짐에 그 칼을 돌렸을 때, 그 스스로가 20대의 적(敵)이 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나는 오히려 더 커진 희망을 읽는다. 김용민 겸임교수의 글에서 보이는 대학생들도 그렇고, '스펙 경쟁'에 함몰된 것처럼 보이는 20대에게서도 오히려 어떤 아름다움이 읽힌다. 그것은 합리성, 유연성, 개인주의와 같은, 과거에 마치 악덕처럼 여겨져왔던 것들이다. 이들은 앙시앙 레짐과 개혁세력의 모순을 동시에 목도하였다. '사다리 걷어차기'를 읽힌다고 해서 "미국은 나쁜 놈이군요"라고 쉽게 말하지도 않을 것이고, '렉서스와 올리브나무'를 읽힌다고 해서 "세계화란 좋은 것이군요"라고 단정짓지도 않을 것이다. 또한 그들의 개인주의도 사회를 바꾸어나가는 큰 벡터가 될 것이다. 그것이 앙시앙 레짐에 의해 강요당한 것이든, 아니면 구세대 개혁가들의 비민주성에 대한 반동으로 만들어진 것이든 관계없이. 거기에 더불어, 그것이 설령 '스펙 경쟁'과 같은 비하적 표현으로 전락한다 해도, 자기 자신을 진보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20대의 모습이 구세대에 의해 매도당할 이유 따위는, 단언컨데, 전혀 없다. 특히 앙시앙 레짐과 공생하며 '20대는 스펙만 높지 무능하다'는 소리를 내뱉는 그 구세대들에게는 특히 그렇다.

20대가 구세대와 다르지 않았다면, 그 아둔한 이명박 대통령의 말 그대로 지난 10년은 '잃어버린 10년'이 아니었겠는가? 우리는 구세대와 '다른 길'을 선택했다. 그건 20대가 특별히 이상한 존재여서가 아니었다.

사족
제목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이 글은 원래 블랙코메디였다. 그런데 다 쓰고 보니 어디에서도 코메디를 읽을 수가 없다...... 어쨌든 문장의 딱딱함과 별개로 이 글은 결국 '공산당 선언'을 패러디한 아래 두 글의 연장선상에 있다.

  1. 여기에는 물론 귀족 노조 운운하는 보수 언론의 프로파간다도 한 축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그 프로파간다가 먹혀든 까닭은 노동운동이 '실제로' 심각한 모순에 봉착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아무래도 타당할 것 같다. 비정규직, 하청업체의 노동자들은 아무 근거도 없는 프로파간다에 속을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Back]

2009/09/30 21:57 2009/09/30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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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울스 2009/10/01 12:38 | PERMALINK | 고치기 | 답하기 |

    다른 길을 선택한다는 것이 정치 투쟁으로 드러날 필요는 없지만 독립된 인식구조를 가지기 위한 공부와 저항은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다른 길을 선택하여 나간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들이 하는 대개의 공부란 게 그런 쪽은 아닌 것 같아요. 스펙경쟁의 의미가 앙시앙 레짐이 만들어 놓은 경제체제에 최대한 복무하기 위한 우리끼리의 싸움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20대의 공부 중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면, 그걸 다른 길을 가는 개인주의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을는지...개인주의란 너나 우리랑 다른 나의 독립성을 중시하는 것인데, 독립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미미한 20대에게 386의 모순이 만들어낸 체제의 결과란 위로를 할 수는 있어도, 현재로선 능동적으로 다른 길을 개척하고 있다고 보긴 힘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참고로 저도 20대랍니다^^;

  2. 예인 2009/10/14 20:59 | PERMALINK | 고치기 | 답하기 |

    이 글은 원래 블랙코메디니까요. :)

    사실 '20대 병신론'(이왕 이 우스운 이름을 쓰기 시작한 김에) 자체가 지극히 좌파적인 시선에서 나온 것 같기도 하고, 앙시앙 레짐이 만든 경제체제라는 개념 자체도 무척 모호한데다 일방적인 적의를 표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해서요. 과연 취업 전쟁을 수동적인 우리들끼리의 싸움으로 격하시킬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훨씬 다양한 시각에서의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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