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잡스(Steve Jobs)의 발표는 발표의 정석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는다. 물론 그의 발표가 완벽한 것은 아니다. 그의 발표는 이미지를 중시하고 세부적인 데이터를 생략하는 경우가 많아, 실제로 기업이나 정부에서 사용하기에 부적합한 점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서적들, 많은 전문가들이 그의 발표 방법을 모범적이고 배울 만한 것으로 손꼽는 까닭은 역시 그의 발표에 어떤 핵심적인 덕목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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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는 원고에나 써 있어야 할 말들을 파워포인트에 주저리주저리 써 놓지 않는다. 위의 사진은 그가 아이폰을 처음 선보이면서 아이폰의 가장 큰 특징인 '멀티터치'를 소개하는 모습이다. 그는 화면에 '멀티터치'의 자랑스럽고 굉장한 각종 기능을 나열해놓는 대신, 핵심적이고 그만큼 충격적인, 그리고 때로는 유머러스한(Works like magic, Patented!) 몇 개의 단어만을 새겨놓았다. 이는 자연스럽게 화면에 대한 주목도를 높인다.

또 하나의 특징은 화면이 화려하지 않다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파워포인트 프로그램(여기에서는 정확히 말하자면 '키노트' 프로그램)이 자랑하는 화려한 화면 전환 효과를 그리 자주 이용하지 않는다. 화려한 화면 전환 효과에 정작 중요한 내용이 잠식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그가 화면 전환 효과를 이용할 때는 그가 얘기하고자 하는 내용,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그 효과가 더할나위없이 잘 어울려 오히려 그 내용을 부각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부족한 내용은 무엇이 채우는가? '멀티터치'의 그 자랑스럽고 굉장한 기능들을 어떻게 소개할 것인가? 답은 단순했다. 스티브 잡스 그 자신이 얘기하면 되는 것이다. 때로는 과장된 움직임을 섞어서, 강조하고 싶은 부분에는 특히 강세를 넣어서. 우리는 늘 그렇게 얘기해왔다. 물론 과거라고 해서 도구가 없었던 건 아니다. 파워포인트가 없을 때는 OHP를 썼고 그마저 없다면 칠판에 판서를 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파워포인트처럼, 발표자 대신 주연 노릇을 했던 것은 아니다.

갑자기 이런 글을 쓰게 된 까닭은 오늘 확인한 공문 때문이었다. 공문의 내용은 이랬다. 그동안 해온 보건 사업 중 1개를 뽑아, 그 사업 내용 및 결과에 대해 발표를 할 것이니 준비하라고 한다. 이 발표는 100점 만점으로 채점까지 할 예정이므로, 먼저 파워포인트 파일을 제출하라고 했다. 파워포인트 파일을 얼마나 충실히 잘 만들었는지에 따라 80점을 부여하고, 나머지 20점은 실제 발표를 얼마나 잘 했는지에 따라 줄 것이라는 첨언도 덧붙었다. 이어지는 첨언. 파워포인트 파일의 분량은 20장 이하로 하라고도 한다.

이건 또 무슨 재앙이란 말인가! 실제 발표보다 파워포인트 파일에 훨씬 높은 배점을 부여하는 것은 정말 우스운 일이다. 파워포인트는 발표를 '도와주는' 소프트웨어고, 파워포인트 파일은 진짜 '발표' 없이는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건 워드프로세서가 아니란 말이다! 만일 내가 담당자였다면 사업 내용 및 결과를 정리한 워드 파일을 제출케 하고, 그 중에서 특히 중요한 내용을 발표회에서 발표하도록 했을 것이다. 이렇게 했다면 저 배점에도 전혀 모순이 없었으리라. 공문으로 내려온 지시는 - 굳이 말하자면 - 워드로 한다면 훨씬 잘 할 수 있는 일을 굳이 파워포인트로 하게 한 뒤, 파워포인트 파일의 탈을 뒤집어쓴 워드 파일을 띄워놓고 프레젠테이션을 하도록 한 것이다. 파워포인트의 장점은 깡그리 무시하고 단점만 극대화한 실로 멍청한 지시다.

더욱 우스운 것은 파워포인트 파일의 분량을 제한한 조치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워드프로세서가 아니란 말이다! 프레젠테이션 파일 한 장에 얼마나 많은 정보를 담을 것인지는 발표자의 재량에 맡겨야 한다. 적은 정보를 담을 때 더 주목도가 높아질 수도 있고, 많은 정보를 담아야 청중의 이해를 도울 수 있는 경우도 있다. 한 예로, 스티브 잡스는 새 노트북 발표회에서 단 3분 만에 이미 20장, 즉 20개의 슬라이드를 넘겨버렸다. 나도 마찬가지로 20분 분량의 예방의학 발표에서는 44장 분량의 파워포인트 파일을 준비했던 반면에, 같은 시간동안 한 논문 리뷰에서는 단 16장 분량의 파일만 준비했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자에 비해 후자가 더 부실한 발표였을까? 물론 그렇지 않았다.

다시 생각한다. 파워포인트는 도구일 뿐이다. 원고에 써 둬야 할 얘기를 파워포인트 파일에 주저리주저리 써 놓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주조연의 자리는 순식간에 뒤집힌다. 파워포인트는 조연에서 주연으로 격상되고, 자신만의 개성적인 화법에 때로는 과장된 움직임을 섞어가며 청중의 눈과 귀를 사로잡아야 했을 발표자는 화면을 가득 채운 지루한 문장을 특색 없이 읽어내려가는 조연으로 전락할 것이다. 이 공문은 파워포인트에게 사람의 주연 자리를 온전히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이 발표회가 얼마나 재미없고 지루할지 벌써부터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2009/10/06 23:36 2009/10/06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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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엽우의 생각 leafriend's me2DAY 에서 트랙백 | 2009/10/17 02:54 | 지우기 |

    예인의 새벽 내리는 길 :: 파워포인트는 보조 도구일 뿐 - 이번 학기에 듣고 있는 소프트웨어 공학 수업 자체의 만족도는 떨어진다. 하지만 교수님이 각 단계별 문서를 먼저 제출하고 각 조별 발표용 슬라이드는 따로 작성하게 하시는 건 좋은 방법이라 생각된다.

  1. 오카 2009/10/07 08:59 | PERMALINK | 고치기 | 답하기 |

    매우 공감되는 말씀입니다.

  2. HJ 2009/10/08 16:56 | PERMALINK | 고치기 | 답하기 |

    공감됩니다. 하지만 아직 위엣 분들은 파워포인트가 마치 제출하는 보고서 마냥 글씨를 화면에 가뜩 체워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제발이지.. 발표에 선진문화를 이끌어 나아가는 한국되길...

  3. thssla 2009/10/08 18:36 | PERMALINK | 고치기 | 답하기 |

    공감이 매우매우 가는 정도를 넘어 요즘 우리나라 기업들의 문서사용 행태가 대부분 이모양이거나 더 나쁘게 흘러가서 우려되는 수준입니다. 일전에 사내에서 식스시그마 교육을 받았는데요, 교육교재가 모두 파워포인트로 되어 있더군요. 설명은 하나도 없고 순 도식만 늘어놓은 교재를 보니 교재를 가지고는 이해를 할수 없더군요. 말로 풀어쓰면 알 만한것을 화살표와 표만 난무하는 밑도끝도 없이 시작하는 도해들이 보기는 좋은지 몰라도 이 역시 워드프로세서와 파워포인트의 용도구분을 못해 생기는 일입니다. 교재는 워드프로세서로 작성해서 말로 내용을 적고 이를 보조하는 수단으로 도식을 쓴 다음 실제 교육에서 파워포인트로 그 도식을 이용해야하는데 거꾸로 되어있더군요.

    그뿐만아니라 워드프로세서로 작성해야할 문건들을 모두 엑셀로 작성해서 내용이 수정되면 줄바꿈이 안되어 일일히 바꿔줘야하고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단지 네모반듯한 테두리치기가 좋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워드프로세서에서 쪽 테두리와 머릿글 바닥글을 지정하면 되는데 그걸 몰라서 하는 것이기도 하고, 워드프로세서의 기본 여백이 너무 넓게 잡혀있어서 여백지정을 하는 것을 잘 몰라 하는것이기도 합니다) 그 불편하디 불편한 엑셀로 문서들을 작성하고 있습니다.

    우리회사만 그런가 싶었는데 우리와 거래하는 다른 회사도 비슷하게 쓰더군요.

    이게 모두 내용이나 실용성보다 번지르르한 외관을 중요시하는 기업문화때문이라고 봅니다.

  4. 예인 2009/10/14 20:52 | PERMALINK | 고치기 | 답하기 |

    기업 쪽에서는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겠는데, 공무원 사회 쪽은 정말 이 문제 때문에 업무 효율이 떨어질 정도로(!) 뭔가 엉망입니다. 스티브 잡스가 우리나라 공무원 사회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한다면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하기도 전에 왜 슬라이드에 내용이 이렇게 부실하냐고 리젝트 당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오피스 사용 기술은 업무에서 가장 기본적인 부분인데 제대로 된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 같지도 않구요.

  5. Hwan 2009/10/16 15:11 | PERMALINK | 고치기 | 답하기 |

    프리젠테이션 젠이라는 책을 읽고 난 뒤 프리젠테이션에 대한 생각을 많이 바꿨죠. 하지만 주변의 대세가 그런 발표를 인정해 주지 않으니... 특히 공무원들을 상대할 때는 정말...

  6. 예인 2009/10/20 22:36 | PERMALINK | 고치기 | 답하기 |

    중앙공무원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지방직 공무원의 오피스 프로그램에 대한 이해도는 정말이지 빵점입니다. ㅠㅠ 차라리 손으로 만드는 게 훨씬 효율적이겠다 싶을 정도니까요.

  7. 7 2009/11/20 12:38 | PERMALINK | 고치기 | 답하기 |

    좋은글 퍼간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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