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영화 프로스트 vs 닉슨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워터게이트 사건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영화이며 사실 영화 홍보사가 영화의 가장 극적인 장면을 예고편에 이미 포함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던 터라 미리니름(스포일러)이 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혹시라도 걱정되신다면 넘겨주세요.

어제 '대통령과의 대화'는 한편의 조악한 쇼를 보는 것처럼 불편한 자리였다. 물론 인정한다.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무척 무거운 자리고, 대통령이 토론의 중심에 나서봐야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괜히 중요하지도 않은 몇 마디가 확대되고 곡해되어 정적들의 집중포화나 받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재미가 없는 건 심하잖은가. 특히 한심한 건 패널들이다. 변명하기에 가장 완벽한 형태로 질문지를 꾸미느라 고생하셨다. 이 우울하고 조악한 쇼를 보고 있으려니 갑자기 영화 '프로스트 vs 닉슨'이 생각난다.

영화 '프로스트 vs 닉슨'은, 퇴물 방송인 프로스트와 재기를 꿈꾸는 노정객 닉슨의 토크쇼를 다루는 정치극이다. 프로스트는 퇴물이 되어버린 자신의 연예인으로서의 입지를 이 대형 방송 한 방으로 회복하려 했지만, 만만찮은 상대였던 닉슨 앞에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반면 워터게이트로 실각한 닉슨은 퇴물 방송인 프로스트를 압도하는 입담과 설득력으로 시청자들을 쥐락펴락하며 그 정치적 입지를 회복하려 했고, 그 의도는 마지막까지 성공을 거두는 듯 했다. 위기의 마지막 순간 프로스트가 던진 질문이 닉슨의 입에서 "대통령의 불법은 불법이 아니"라는 궤변을 유도해내기 전까지는.

전대미문의 정치적 스캔들로 사임한 전직 대통령과 엄연히 과반에 가까운 지지를 얻어 탄생한 현직 대통령을 비교하는 것은 아니다. 프로스트처럼 세종시와 관련해 이명박 대통령이 쏟아낸 거짓말들, 공약(空約)들을 맹공해 "대통령의 거짓말은 거짓말이 아니"라는 궤변을 이끌어냈어야 했다고 주장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보고 싶었던 것은 치열한 싸움이었다. 논쟁이었고, 세련된 정치극이었다. 프로스트 vs 닉슨을 보라. 프로스트의 입장도, 닉슨의 입장도 나름 절박했다. 돋보이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과의 대화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이명박 대통령 한 사람만 돋보이게 해 주면 그만이었다. 그러니 누구도 이명박 대통령의 '상대'가 될 수 없었고, 그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질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세종시 문제에 대해 대화하려거든 이명박 대통령의 거짓말과 세종시 수정안의 현실화 가능성, 수정안이 실제 미칠 영향에 대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기를 바랬다. 감세 정책을 비판할 것이었다면 레이거노믹스에 비판적인, 발에 차일 정도로 많은 '저명한 경제학자'들의 이름 하나쯤은 들고 나왔어야 했다. 그리고 그 '저명한 경제학자'들에 비견할 만한 경제학자가 레이거노믹스를 우호적으로 평가한 사례가 사실상 없음을 들어 그 정책을 공박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프로스트처럼 '절박한'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세종시나 4대강, 여러 정책에 대해 이명박 대통령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질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아마 이보다 훨씬 어려운 질문들이 던져지지 않았을까.

그것이 무슨 뜻인지 시청자들이 몰라도 좋다. 크루그먼이 누구인지, 래퍼 곡선이 무엇인지, 공급주의가 무엇인지 따위를 몰라도 아무 상관이 없다. 그 자리에서 무슨 본격적인 학술적인 논의가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니. 다만 필요한 건 단 하나의, '장면'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당황하거나, 말을 더듬거나, 땀을 닦으며 대답을 회피하거나 하는 단 한 장면. 또는 그 반대라도 좋다. 이명박 대통령이 엄청난 달변으로 날카로운 질문에 대응하고 오히려 패널이 당황해하는 장면. TV란 애당초 대단하고 깊이있는 토론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그러나 그 한 장면, 인상적인 단 하나의 장면이 가져다주는 충격은 깊이있는 토론 이상의 영향력을 끼친다. 그 장면을 보기 위해, 그 표정을 더 완벽하게 잡기 위해 온갖 촬영기술이 존재하고 HDTV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과의 대화에서는 그런 충격이 없었다. 단 하나의 장면이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패널들의 질문은 한심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최대한 대답하기 쉽게 하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질문 속에 이명박 대통령의 입장을 대변해주고 핑계를 섞어넣느라 정말이지 애를 썼다. 연예인 패널들은 재앙 수준을 넘어 2012년 세계 멸망 정도가 아니고선 비견하기 어려울 정도로 끔찍했다. 속된 말로 '된장성'이 가득했다. '아침마당'이나 '좋은아침' 같은 프로그램에나 어울릴 패널들이 나와 이명박 대통령의 서민적 면모를 칭송하기에 바빴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 한심하고 끔찍한 패널들의 질문에 대해 고등학교 사회책에나 나올 것 같은 모범답안을 읊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말하기에는 너무 수준이 낮은 대답이었지만 큰 무리가 없었다. 이미 질문이 그보다 훨씬 수준이 낮았기 때문에, 오히려 수준이 높아 보일 지경이었으니까.

이명박 대통령이 몸개그라도 하지 않는 이상에야 충격적인 장면이 나올 리 없는 일이었다. 그러고보니 차라리 몸개그라도 좀 하셨으면 신문 1면은 따다 놓은 당상이었을 걸 아깝다고 생각하고 계실런지도 모르겠다. 당장 봐도 어제의 대화는 이미 이슈에서 벗어나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떨어져버렸다. 다들 아이폰 얘기하고 아이유 보면서 침흘린다. 아, 마쉬멜로우......

1줄 사족
선우용녀는 빨리 다시 세바퀴로 복귀해 본격 성인대화(?)를 부탁드립니다.


2009/11/28 16:27 2009/11/28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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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4대강 사업은 반드시 추진되어야 한다. 남해방랑기 에서 트랙백 | 2009/11/30 23:30 | 지우기 |

    "안 꾸준하게 그저 꼴리는데로"라는 마인드로 중무장하여 블로그질을 하는 나에게도 절대 금기시하고야 말리라고 다짐한 포스팅이 바로 "정치의,정치에 대한,정치를 위한..."포스팅. 참여정부에 이은 토목정부 또한 그닥 좋은 감정은 아닌었던지라 술발린김에 순간 피크레벨이라도 발동하여 나랏님 뒷담화라도 한번 깠다간...? 그로 인하여 하드(얼음과자 말고)라도 압수수색 당한다면? 각종 야구동영상으로 인하여 친일파라는 사실을 커밍아웃 당할테고, "킹 오브 불법..

  1. 나그대 2009/11/29 23:14 | PERMALINK | 고치기 | 답하기 |

    이미 대통령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멀어진 것 같습니다. 지친 것이지요...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고
    눈이 작은 이유는 목표밖에 보지 않는 것이라는 말까지 생겨났으니까요.
    솔직히 저도 토론 프로그램 챙겨보는 편인데 안봤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전부터 토론프로그램이나 강연회에서의 동문서답식의 말들을 잘 보아왔기에
    그리고 분명 이번엔 대선 전과 위치가 달라지셨으니 예인님의 쓰신 글처럼 충분히 예상되는 그림이 있어 차마 그 쇼를 보고 싶진 않더군요...
    그저 걱정입니다...

  2. 무명군 2009/11/30 23:29 | PERMALINK | 고치기 | 답하기 |

    아 저는 이번 호러쇼를 감상하고 나서야 비로서
    가카의 깊은 뜻을 간파하고
    그 간 가카에 대한 모든 오해를 풀수(?) 있었습니다.

  3. 예인 2009/12/06 13:49 | PERMALINK | 고치기 | 답하기 |

    일전에 시사인에 올라왔던 굽시니스트 님의 만화가 좀 짱이었슴다. 대통령의 문제를 아주 속시원하게 까버리시더군요. 솔직히 지금 가카는 진심으로 "까야 제맛"이란 생각이 듭니다. 이미 논리적으로 설득한디거나 할 수 있는 단계를 한참 넘어서신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