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의 주류 음악계에서 나온 노래 중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바나나걸의 <초콜렛>이라는 노래였다. 특출난 사운드나 멜로디, 모험성이 돋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이만큼 대중적인 질감과 충실한 완성도를 동시에 확보한 노래가 또 얼마나 있었을까. 전자음의 반복 속에 숨어있는 중독적인 멜로디는 비교적 변화의 요소가 적고 심심한 느낌의 리듬을 거의 완벽하게 보완한다. 노래 위에 얹힌 이현지의 발랄한 목소리도 잘 어울린다. 만일 내게 ‘한국대중음악상’ 심사위원 자격이 있다면, 더 말할 것도 없이 이 노래에 올해 대상을 안겨줄 것이다.
팝 얘기를 하면 존엄성이 떨어진다는 생각 때문인지, 아니면 음악 감상의 영역에 아예 팝 음악을 들여놓지 않았기 때문인지, 평단에서 팝에 대한 얘기를 들어보기란 쉽지 않다. 기껏해야 “SG 워너비는 최악이다”라든가, “이효리나 비가 없는 시상식을 만들어야 한다”는 식으로 비하와 천대의 대상이 될 뿐이다. 그러나 팝은 쉽고 재미있게 우리를 감동시킨다(affect). 샤키라가 <Hips don’t lie>를 부르며 “No Fighting”을 외친다. 그럼 나 역시 그 화합과 평화의 춤판에 끼어들지 않을 수 없다. 비가 <I’m coming>을 부르며 민소매티를 찢어발긴다. 누님들은 이내 행복의 세상으로 빨려들어갈 것이다. 이래도 팝이 천하단 말인가?
그러나 사실 팝을 멸시하는 시선은 평단보단 오히려 대중으로부터 더 자주 나온다. 특히 한국 가요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사람들은 빅마마의 뛰어난 가창력을 얘기하며 엄정화의 ‘구린’ 노래에 대해 얘기하고 낄낄거린다. 아마 그 사람들이 엄정화의 <Prestige>를 누가 프로듀싱했는지 안다면 놀라 뒤집어질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팝가수의 앨범은 타이틀곡 빼면 들을 게 없다며 그들을 평가절하한다. 정작 그들 중 앨범 전곡을 들어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유니는 온갖 악플에 시달리다 결국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 비극적인 짧은 삶을 마감했다. 유니가 얼마나 훌륭한 팝 가수였는지 그 악플러들은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진짜 <Call Call Call>은 시험기간마다 학생회실에 울려퍼진 최고의 활력소 중 하나였는데, 다신 들을 수 없겠구나. “솔직히 넬의 음울한 노래보다 유니 노래가 훨씬 좋지 않나요? 음울한 게 취향인 사람 빼고.”
여하튼, 이런 왜곡된 잣대 때문에 결국 이효리는 <잔소리>나 <그녀를 사랑하지 마>같은 난감한 노래를 불러버렸다. <Get Ya’>나 <Dark Angel>도 난감하긴 마찬가지였지만, 이건 정도가 좀 지나치다. 어째서 좋은 목소리와 좋은 무대 장악력을 가진 가수가 어울리지도 않고 좋지도 않은 노래를 부르느라 자신의 전성기를 썩혀야 하는가? <Get Ya’>가 그냥 순간적인 실수라면, <그녀를 사랑하지 마>는 아예 길을 잘못 들어가는 꼴이다.
팝은 좋은 음악이다. 정말 좋은 음악이다. 이 음악은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받고 춤을 추게 한다. 많은 사람들은 기타를 치고 드럼을 치는 어떤 장르가 팝보다 우월하다는 착각을 하지만, 알고 보면, 그 기타리스트의 손동작도 음악에 대한 일종의 춤은 아니었을까? 우리는 먼 옛날부터, 그저 춤을 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 암만 머리를 굴려 봐도 기타 나부랭이가 춤보다 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질 않는다. 수 천 년
전부터, 음악이 세상에 존재한 이래, 혹 음악이 존재하기 이전부터도 사람은 춤을 춰 왔다. 그렇다면 그 위대한 록커들의 기타
소리도, 결국 비보이와 비걸들의 춤과 그 원류(原流)는 완전히 똑같은 것이 아닐까. 신이 창조한 위대한 음악의 선율과 사람의
몸을 결합시키기 위한 신내림의 의식과 같은. 그렇다면 팝이야말로 그 본질에 가장 가까운 음악일지도 모른다.

쵸콜렛은 정말 중독성 있죠. _ )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