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위피는 장벽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해외 단말기가 못 들어오는 건 위피 때문이 아니라 이통사와의 계약 문제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 아니다. 그러나 실제 미국과 캐나다 정부가 FTA 협상에서 ‘비관세장벽으로서의 위피’를 문제삼았던 전력이 있다. (미국이 문제를 삼은 건 사실 2번 항목과 관계가 깊었다.) 이런 정황을 무시하고 ‘위피는 해외 단말기 수급이랑 아무 상관 없음’이라고 말하려면 뭔가 실증적인 근거가 있어야 한다.

2. 근데 사실 처음부터 국가가 주도해서 기술을 만들고 그걸 기업들에게 강요한다는 것 자체가 통상마찰의 가능성이 꽤 높은 상황이었다. 국가가 시장에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개입하면 당연히 시장이 왜곡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건 대한민국 자본주의의 근간적인 문제다. 국가가 기업의 기술을 제어하려드는 ‘반자본주의적 문화’ 자체가 한국의 문제란 거고, 이 얘기는 <국가의 교도>의 최종 결론이기도 하다. 극단적인 예로, 공산주의 국가가 “너네 우리 나라에서 물건 팔아도 됨”이라고 말한다고 기업이 앞뒤 안 재고 “우왕ㅋ굳ㅋ감사”하고 들어갈 수는 없는 법이니.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피를 도입해야만 했고, 지금 위피를 지켜야만 하는 이유는 무슨 표준이 어떻고, 소비자 권익이 어떻고 하는 문제가 아니다. 통신사와의 관계에서 을(乙)의 입장으로 고통받고 있는 컨텐츠 개발사들을 그나마 지켜주는 것이 바로 이 위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통신사와 컨텐츠업계 사이의 관계를 정상화하기 전까지는 위피를 한시적으로 유지해야 한다, 는 주장이 그나마 설득력이 있다. 물론 여기까지는 그저 추정일 뿐. 만일 이 주장이 받아들여지려면 통계 따위를 비롯한 실제 근거가 있어야 하고, 위피 의무화 규제를 폐지할 때 일어날 문제에 대해 이 실제 근거를 기반으로 계산해 보여주어야 한다. 그게 가능하다면 위피, 지켜야 한다.

(3′. 위피는 정부가 정한 표준이지만, 공공재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표준이기 때문에 지켜져야 한다”는 얘기는 전파나 전기,
국방이나 법률, 의료같은 분야에서나 통하는 일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해, 이들은 여러 요인(시장가격 없음, 수요공급 부조화,
외부효과 등)으로 인해 시장 실패의 우려가 짙기 때문에 정부에 의해 공급되거나 정부에 의해 표준이 정해진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표준이니 지켜야 한다는 얘기 안에는 이런 논리가 숨어 있는 건데, 이걸 위피에 가져다 붙이면 곤란하다.)

4. 그런데 왜 위피 폐지론을 얘기하는가? 사실 블랙베리랑 아이폰, 노키아랑 소니에릭슨 때문 맞다. 소비자 입장에선 위피 있는 휴대전화도 쓰고 아이폰도 쓰고 블랙베리도 쓰고 노키아도 쓰고 소니에릭슨도 쓰고, 이런 환경을 원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위피 의무화 유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걔네들 못 들어오는 거 위피 때문 아님”이라고 주장을 하게 되는데, 이 주장이 말만 들어서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1번에서 얘기한 ‘정황’이나 2번에서 얘기한 부가적인 사정 때문에 때문에 소비자 입장에선 그 주장을 믿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애플이 국가에 따라 소프트웨어 고치는 걸 죽기보다 싫어한다는 얘기는 이미 정평이 나 있다. 참 슬픈 얘기지만 시장에선 소비자가 원하는 게 킹왕짱이다. 그리고 그게 정상적인 시장이다. 공급자의 사정을 봐줘가며 소비자가 소비를 해야 한다, 그런 시장을 원한다면 소련으로 가면 된다.

5. 그러나 그렇다고 “아이폰 쓰고 싶으니 위피 폐지하셈”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좀 더 진지하게 위피 폐지를 얘기하는 사람들은 위피가 이미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고, 오히려 실효성을 잃기 시작한지 한참이라고 주장한다. 위피의 시장점유율은 100%다. 위피가 탑재되지 않은 휴대전화는 시장에 돌아다닐 수가 없으니까. 게다가 휴대전화 시장은 포화상태. 포화상태의 시장에서 100%의 지배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의무화 조항이 폐지된다고 해서 그 지배력을 상실한다면 그건 위피가 쓰레기라는 증거밖에 안 된다. (인터넷에서 사람들이 위피 최악, 위피 꺼져를 외치고 있다고 하지만 그건 사실 위피와 WAP을 혼동한 것일 뿐, 실제 위피 없는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는 유저들은 위피를 원하는 경우가 많다. 그 사람들이라고 맞고 안 하고 MMS 안 쓰는 게 아니니까.)

6. 실효성을 잃은 표준안이 계속 유지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가? 외국 단말기 못 들어오는 문제는 빼고 생각한다면. 우선 진보의 속도가 느려진다. 컨텐츠 개발사들 역시 세계적인 흐름에서 도태된다. 위피 없이는 못 산다는 소리가 나온다. 예전엔 이래도 큰 문제가 없었다. 어차피 세계 어느 나라를 가봐도 딱히 돋보이는 플랫폼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강력한 성능을 가진 스마트폰이 뜨기 시작한다. 아이폰이나 안드로이드, 블랙베리가 화제의 중심에 선다. 그러나 개발자들은 아이폰이나 안드로이드로 이사가봤자 절대로 돈 안 된다고 얘기한다. 거기로 이사갈 돈도 없다고 얘기한다. 물론 그들의 주장이 맞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여긴 자본주의 사회고, 시장경제의 원칙이 있는 사회다. 국가가 정해준 표준안만 믿고 그것만 주구장창 파서 장사할 수 있는 시장을 원한다면 타임머신 타고 소련으로 가야 한다. 위피가 있으면 아이폰을 못 들여온다는 문제는 위피 문제를 공론화시킨 촉발제였을 뿐, 그 자체는 사실 위피 문제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7. 사실 아이폰이 제일 시끄럽긴 하지만, 위피의 대안으로 아이폰 플랫폼을 택하는 건 미친 짓이다. 아이폰은 그냥 ‘여러가지 플랫폼 중 하나’일 뿐이며, 아이폰의 사업모델을 다른 회사가 따라하는 것 또한 몹시 곤란한 일이다. 아이폰처럼 단말기 제조사에 종속된 플랫폼 따위가 위피의 대안이 될 수는 없고, 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것 또한 기억해야 한다. 누구도 아이폰을 위피 대신 표준으로 격상시키라고 말하지 않았다.

8.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폰은 위피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개발자들이 원했던 모든 것들이 구현되어 있다. 개발 도구는 100만원이 채 안 되고, 매년 10만원씩 내면 판매 루트까지 다 뚫어 준다. 완벽한 에뮬레이터가 제공되며, 개발이 PC 소프트웨어를 만들 때처럼 쉽고 직관적이다. (잘 사용되지 않는 ‘Objective-C’ 기반이기 때문에 이걸 배우기까지의 시간은 필요하다.) 시장분석기관의 예측에 따르면, 앞으로 1년 이내에 위피 플랫폼의 2배에 달하는 시장을 갖게 될 것으로 추산된다. 애플과 개발자간의 수익 배분 구조 역시 이통사와 개발자간의 갑을관계에 비하면 천국이나 다름없다. 아이폰으로 이사갈 돈 없다고 얘기하는 개발사도 있겠지만, 심지어 ‘개인 개발자’조차 아이폰으로 이사가서 엄청난 수익을 냈다는 얘기가 계속 들린다. 아이폰 소프트가 지금 완성도가 아주 뛰어나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대부분 엉망이다. 이제 겨우 ‘발 한 번 담가볼까’ 하는 상탠데, 그런 엉망인 소프트웨어 중에서조차 성공작이 나온다. (어떤 사람은 화면을 하얗게 만드는 소프트를 만들어 그걸 팔고 있을 지경이다!) 뭐 그렇다고 해서 위피 개발자들이 위피 포기하고 아이폰으로 이사가야 한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아이폰이나 안드로이드 같은 것들은 시장을 지배하는 위피 ‘말고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일 뿐이다.

9. 미국 언론은 “기존 소프트웨어 시장에서 한계를 느낀 개발자들이 아이폰이나 안드로이드 같은 새로운 형태의 시장에 매력을 느끼고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있다”고 얘기한다. 뭐 인프라나 뭐나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나는 미국 IT 업계와 한국 IT 업계를 직접적으로 비교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더 하고 싶은 얘긴 후략.

10. 위피의 문제는 결국 ‘기한’의 문제다. 유통기한 일주일짜리 우유를 만들어놓고 몇 달동안 팔려고 했다는 게 문제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즉시 폐기되어야 했던 위피가 정부 정책의 경직성으로 인해 그 생명을 무리하게 연장했던 것이 결국 작금의 상황 – 컨텐츠 개발사와 소비자가 대립하는 상황을 낳았다. 그럼, 위피 의무화 유지론자들이 얘기하는 – 아직 위피의 유통기한이 남았다는 근거는 무엇일까. 나는 모르겠다.

한 줄 요약 : 심각한 문제가 없을 경우 기본적으로 국가는 시장에 개입을 피하는 것이 맞다.

  11 개의 반응

  1. 아주 폐쇄적이며 개발자들이 돈써가며 개발해야되는 황당한 플랫폼인 위피는 발전될수없고 빨리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 아.. 그렇군요 잘 몰랏는데 감사해요

  3. 님하의 의견에 100% 동감. 경색된 뇌세포를 지닌 인간들이 통치를 하는 어느 나라에서는 이런 문제가 있는지조차 모르다가 어느날 이상한 방향으로 해결하려고 할꺼임. 뭐라고 하고 싶으면 오픈웹 소송 결과를 보시라능. 마소더러 제말 엑티브엑스 걍 쓰게 해달라고 매달리는건 널리 알려진 사태인듯. 진짜 뭣도 없냐능!

    몇가지 에라가 있어서 바로 잡는다능. 1) 개발도구는 100% 공짜임. 엄창걸고 님하 돈 한푼 않들어감. 2) 배포는 10만원 100만원 이렇게 두가지 버젼이 있다능. 3) 예전에 JavaME로 프로그램 만들어서 함 배포해보다가 자동차 한대날리고, 아이폰환경보고 진짜 함 열받아서 울었심. “천국”이라고 애매하게 비교할 상황이 아니라, 그정도로 킹왕짱인듯. ObjC? 절대 어렵지 않음. 그것때문에 개발힘들다고 하면 “개발자”라는 타이틀좀 때시기 바람. 짱남.

    가장 큰 문제는, 이렇게 왜곡된 시장질서와 사회적이 시스템이 문제인줄조차 모르고, “대한민국! 짝짝짝” 하는 대다수의 사람들 때문이라능. 님하는 진짜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생각하시냐능? 우리는 우리수준에 딱 맞는 사회에서 살고 있는거 아시냐능?

    • 지적 캄사 캄사. 사실 개발도구가 100만원 이하라고 말한 건 나름 이유가 있었어효. 어차피 아이폰 SDK를 돌릴라믄 맥 OS X이 필요하고, 맥 OS X을 돌릴라믄 맥이 꼭 필요한데…… (요건 사실 ‘해킨토시’라는 음성적인 방법을 쓰면 피해갈 수 있긴 함.) 울나라에 맥 갖고 있는 개발자는 거의 없을테니 100만원이 든다고 얘기했던 것임. 물론 횽 말처럼 개발도구 자체는 공짜가 맞는 걸로 알고 있어효.

      물론 희귀동물인 저는 맥 유저라 횽 말대로 돈 한 푼 안 쓰고 개발도구 받아다 쓸 수 있다능. 하지만 이미 헬로 월드도 만들 수 없어진 나는 개발도구를 받아봤자 아무 의미가… ㅠㅅㅠ

  4. 달면 씹고 쓰면 뱉는 세상…^^

  5. 기본적으로 우리 나라 정부의 시장 개입이 지나친 것 같습니다. WIPI 시작 동기는 좋았으나, 결국 세계 시장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 한 우리 나라 소프트웨어 기술력을 탓해야 겠죠. 어서 빨리 우리 나라 정부,기업들이 제조 마인드를 버려야할텐데… 그 놈의 기득권이라는게 앞을 가로 막는 형국이죠.

  6. 돌이켜 본다면 위피가 생기기 전에 SK-VM, KTF BREW, LGT JVM 같이 표준과는 한참 동떨어진 플랫폼이 난립하고 있었던 상황은 분명 ‘심각한 문제’ 였지 말입니다.
    그래서 위피가 나온거고, 현재로서는 위피의 역할을 다 한지 오래고 말씀하신 그 ‘새로운 가능성’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 문제를 가지고 누구를 때려잡으라고 한다면 이통사들부터 먼저 두들겨 패주고 싶은게 제 생각이라 ^^ 그 다음 타겟이 정부와 위피 프로젝트를 주도했던 애들이구요.

  7. 글 잘 봤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공감가네요^^

  8. 시원한 글입니다.
    한 줄 요약도 압권입니다.

  9. 글 쓰신 분이 상당히 객관적으로 짜임새 있게 써주셨지만 그래도 비기술자인 일반인들에게 WIPI 의 타당성을 호소력 있게 뒷받침 하기엔 여전히 명분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WIPI가 문제 된것은 그것이 부실해서가 아니라 국가가 강요했다는데 있습니다.

    아무리 전세계가 MS윈도우 보급율이 엄청나다 해도 그 어느 국가도 PC탑재 의무화를 외치진 않습니다. 개발자의 입장에서 바꿔 말하자면 그 어느 국가도 PC에플리케이션 개발은 Win32 API를 사용하도록 법적으로 강요하는 곳은 단 한 곳도 없죠. 허나 MS윈도우는 근 20년 PC OS시장 경쟁을 통해 승자로 등극했고 그로인해 Win32API는 거의 표준 개발 플랫폼이 되었죠. 바로 이 자유 시장 경쟁 과정을 WIPI는 거치지 않고 시장의 승자로 출발했고 바로 이 점 때문에 소비자들은 WIPI 플랫폼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신이 내린 명석한 천재소리 듣는 대통령이 나왔다 하더라도 그가 선거를 거치지 않고 등극한다면 그 어떤 국민도 그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WIPI는 바로 그 시장 경쟁을 거치지 않았고 소비자는 그래서 WIPI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것입니다.

  10. 글 솜씨가 좋으시군요. WIPI에 대해 잘 몰랐었는데 이곳에서 WIPI 에관한 몇몇 글들을보고 많은 정보 얻고갑니다. 좋은시간되세요.

 댓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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