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경(2004)
그린비
<자본>은 맑스 최대의 저작이지만, 사실 이에 대한 국내의 연구는 많지 않은 편이다. 이는 맑스의 정치적 영향력이나 <자본> 자체의 완성도를 생각할 때 이는 매우 이상한 일인데, 아마도 경제학자들이 그토록 혐오하는 “자본주의의 외적 요인” – 즉 한국 현대사를 피로 물들인 군부 통치 체제, 그리고 시장주의자들의 득세가 그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진경 교수의 <자본을 넘어선 자본>은 그 거대한 자본주의의 ‘외적 세계’를 그리는데 집중하며, 이는 그가 좋아하는 프랑스 철학 – 특히 들뢰즈의 – 에 기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책에 따르면, 화폐자본은 상품화된 노동력을 구매하며, ‘노동력’이 수행하는 ‘노동’을 통하여 상품자본을 생산한다. ‘노동’이 상품자본을 생산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양화(量化)되고 가치화되었기 때문이며, 그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자본주의의 외적 요인’ 때문이다. 숙련공의 노동, 이를테면 시계공의 노동과 예술가의 노동을 양화시켜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오늘날 화이트컬러의 사무노동, 블루컬러의 공장 노동은 비교적 양화가 용이하다. 이러한 노동 양태의 변환이 ‘화폐’의 등장과 맞물려 수행하는 것이 노동의 양화이며, 노동력의 상품화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 따라 화폐자본은 노동력을 이용해 상품자본을 생산하며, 상품자본은 ‘소비’되어 화폐자본으로 ‘증식’된다. 노동력을 이용하는 과정에서 잉여가치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M_
자본가는 이런 메커니즘을 통해 최초의 "무한소에 가까울 정도로 작은 자본"을 가지고 무한히 거대한 자본을 만들어가는데, 기실 자본가가 가지고 있던 "작은 자본"역시 정상적인 방법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위대한 '시장' 외적인 요인, 저 유명한 엔클로저 운동이나 빈민법(The Poor Law), 대항해시대와 같이, 농민들, 도시 빈민들, 원주민들을 탄압하고 노동자로서 재생산하는 피로 얼룩진 역사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은 또한 노동을 양화시키는 전제 조건이었으며, 농민과 원주민들을 수혜적 공동체에서 내쫓고 시장으로 강제 편입시키는 방법이기도 했다. 사실 그 위대한 '시장' 역시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닌데, 이는 한자(Hansa) 동맹으로 대표되는 당시의 교역자들이나 화폐의 발생에 대한 역사적 설명 등으로 이미 증명되었다. 물물교환이 확대되어 화폐교환으로 발전한다는 교과서적 설명은 틀렸다.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는 시장은 어디까지나 물물교환과 수혜적 공동체주의가 지배하던 과거의 사회를 파괴함으로써 들어선다. 자본의 증식이 이루어질 수 있는 최종적인 단계인 '소비' 역시 이러한 자본축적의 메커니즘과 더불어 그 나라의 소비 양식, 곧 문화가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는데서 자본주의 내적인 메커니즘이라 하기 어렵다. 게다가 소비의 단계에 나타나는 가격과 가치 불일치와 이윤 평균화 역시, 자본주의의 내적 메커니즘으로는 설명되지 않으며, 이윤율 저하는 필연적으로 공황을 일으킨다.
_M#]
책의 내용은 전통적인 맑스 경제학과 다르다. 이진경 교수 스스로도 책 속에서 수 차례 얘기하지만, 기존 맑스 경제학은 맑스의 <자본>이 정치경제학과 노동가치론의 선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진경 교수는 이를 반박하고 ‘자본 외부’를 지향하는 방법으로 재해석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진경 교수의 책은 그 책 자체만으로 가치를 갖는다기보다 정통 <자본> 해제와 함께해야 비로소 가치를 – 그것이 알맹이든, 껍데기뿐인 것이든 – 빛내게 될 것이다. 이진경 교수의 <자본> 재해석에 반박하여 김동수 씨가 쓴 <자본의 두 얼굴>이란 책이 있으나, 이는 <자본>에 대한 해설서라기보다 말 그대로 <자본을 넘어선 자본>에 대한 반박에 가깝다. 국내에는 김수행 교수가 번역한 <자본론>이 나와 있는데, 사실 전공자들이 읽기에도 벅찬 책으로, 교양 수준에서라면 같은 저자의 <자본론의 현대적 해석>이나 손철성 박사가 청소년들을 위해 풀어 쓴 <자본론 – 자본의 감추어진 진실 혹은 거짓> 등이 유명하다. (물론, 국내에서 “청소년 교양서”란 사실 성인이 읽기에도 힘겨운 경우가 많다.)

최근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