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는 소녀의 손을 잡고 자수가 걸어간 곳으로 따라갑니다.

여기는 창고입니다. 무지하게 넓습니다. 다리가 스무 개는 달려 흐물흐물하게 움직이는 이상한 로보트도 있고, 낡아빠진 사진들도 있네요. 자수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으로 다시 성큼성큼 걸어서 사라집니다.

"현실은 실로 순간이라오. 지금의 나는, 1초 전의 나와 다른 분자를 가지고 있소. 생각을 시작하는 순간에서 끝내는 순간, 전기가 신경을 따라 흐르는 그 짧은 순간에조차 우리는 계속 변해간다오. 하물며, 기억조차 나지 않는 어린 시절의 나와, 지금 당신을 여기로 데려온 내가 같은 존재라는 것을 그대는 어떻게 확신할 수 있소? 스카이스크래퍼로 그대를 데리러 왔던 나와, 자수의 창고에 그대를 데려온 내가 같은 인물이란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소?"

사내의 물음에 소녀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합니다.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갑옷을 입고 스카이스크래퍼에 올라왔고, 이내 나를 데리고 이 벌판으로 꺼내 주었고, 더 많은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자수 선생의 연구소로, 그리고 창고로 데리고 왔죠." - 이 말을 하는 동안, 연구소에서 또 작은 폭발음이 들렸고, 자수의 "이런, 될 뻔 했는데"하는 목소리도 뒤따라 들렸습니다 - "당신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당신의 손짓을 기억하고, 당신이 준 희망을 기억해요. 당신이 그 때의 당신과 다른 존재일지언정, 내 기억 속에 있는 당신은 분명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당신이 맞아요."

사내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다시 문답을 이어갑니다.

"그럼 그대는 어떻소? 내가 그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대는 금발의 소녀였는데, 지금은 육감적인 흑발의 연인이 되어 있소. 이처럼 모습이 바뀌었는데도 나는 그대를 내가 구해왔던 그 소녀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오?"

"나는 그 금발 소녀와 흑발 여인이 같은 사람임을 확신할 수 있어요. 금발 소녀와 흑발 여인은 같은 기억을 공유하죠. 그리고 같은 미래를 꿈꿔요. 금발 소녀는 흑발 여인이 비로소 스카이스크래퍼로부터 탈출하는 그 날을 꿈꾸며, 흑발 여인은 금발 소녀가 맛없는 당근 스프에 괴로워하던 그 날을 기억해요. 당신이 나를 서로 다른 두 존재로 인식할지언정, 나는 나의 기억을 공유하므로, 나는 하나에요. 금발 소녀와 흑발 여인이 한 사람이라는 것을,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기억과 추억을 모두 걸고 약속할 수 있어요."

"여기는 기억의 창고라오." - 사내가 그 말을 한 순간, 자수의 "됐다!"하는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 "스무 개의 다리가 달린 로보트도, 저 낡아빠진 사진들도 모두 기억이 담겨 있는 것들이오. 그 기억이 그대가 그대임을 확신케 한다오. 그대가 그대임을 확신할 때, 나는 또한 그대가 그대임을 확신할 것이라오. 이것은 결코 끊어질 수 없는 고리요. 그 어떤 고난도 빼앗을 수 없는 그대의 정체요. 그대가 그대의 모습을 잃더라도, 그대의 이성을 잃고, 그대의 감정마저 잃어버리는 고통스러운 날이 올지라도, 이 고리만은 결코 끊어지지 않을 것이오. 축하하오. 그대는 스카이스크래퍼로부터 도망칠 하나의 실마리를 잡게 되었소."